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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서울 이야기/명예기자의시각

FC서울. 역대 최고의 ‘패스의 달인’은 누구?








축구의 백미는 역시 골이다. 축구 경기에서 터지는 시원스런 골로 인해 양 팀의 희비가 엇갈리고,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열광한다. 이처럼 골은 실로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 골이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다. 골을 넣기 위해서는 패스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좋은 패스 없이는 좋은 골 역시 나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최고의 골잡이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패스의 달인’을 보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FC서울 역시 훌륭한 패스의 달인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마치 16년 동안 5만7천여회의 패스라도 한 듯 공격진 뒤에 배치되어 양질의 패스로 무수한 골들의 도우미 역할을 했다. 그럼 지금부터 FC서울 역대 최고의 ‘패스의 달인’들을 알아보자.



1. 안드레







풀네임 : Andre Luiz Alves Santos

생년월일 : 1972년 11월 16일

국적 : 브라질

FC서울 활동년도 : 2000~2002

FC서울 통산 기록 : 96경기 18골 27도움



FC서울의 전신인 LG치타스 시절에 활약했던 안드레는 2000년 팀의 세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로도 유명하다. 브라질 프로축구 2부리그 마릴리아클럽에서 뛰던 안드레는 키프로스 전지훈련에서 당시 감독이던 조광래의 눈에 띄어 한국땅을 밟는다. 브라질 외에 다른 나라에선 뛰어본 적이 없고 이적료 역시 50만 달러로 당시 유고에서 영입한 드라간의 이적료(120만 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에 그를 향한 주목도는 다소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팬들의 주목도를 조금씩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포항과의 대한화재컵 첫 경기에서 한국 무대 데뷔전을 치른 안드레는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대한화재컵 총 7경기에서 2골 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플레이메이커로서 제몫을 다하게 된다. K리그에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다. 빼어난 개인기와, 날카롭고 정확한 킥을 장착한 안드레는 조광래 감독 축구의 핵으로 자리잡았고. 시즌 중반 10연승의 상승세를 이끌기도 했다.
 

또 8월5일 전북전과 8월19일 부산전에선 두 경기 연속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이 2-1, 5-0의 승리를 거두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 이러한 안드레의 활약 속에 팀은 리그 1위를 달성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선착한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부천(現제주)을 상대하게된 안드레는 1차전에서 왕정현에게 정확한 패스를 배달하며 팀의 선제골을 이끌어냈고, 자신도 팀의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4-1 승리를 견인했다.


2차전에서는 부천 곽경근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끌려갔지만 후반 안드레의 정확한 프리킥이 동점골로 이어지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2000 K리그의 패권을 차지했다. 안드레의 활약상은 당시 공격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공격진에 포진했던 최용수와 정광민은 안드레의 뛰어난 패스를 공급받으며 각각 14골과 13골을 기록했고 안드레 역시 14도움으로 전경준(13도움)과 마니치(9도움)을 제치고 도움왕에 올랐고 K리그 베스트 미드필더에 뽑히기도 했다.
 

또 우수한 플레이메이커 답게 프리킥과 코너킥을 전담한 안드레는 9골 중 무려 8골을 프리킥으로 성공시키며 정확한 킥 솜씨를 자랑했다. 2001년엔 허리부상으로 2골 4도움에 그쳤지만 이듬해인 2002년엔 7골 9도움을 올리며 오름세를 보였고 2003년엔 중국 칭다오로 이적하게 된다. 그 뒤 베이징 현대를 거치며 3년 간 중국에서 뛴 안드레는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된다. 안드레가 K리그에서 활약한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간다. 하지만 절정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세 번째 우승에 큰 공을 세웠기에 올드팬들에겐 아직도 회자 되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2. 히칼도









풀네임 : Ricardo Nuno Queiros Do Nascimento

생년월일 : 1974년 4월 19일

국적 : 포르투갈

FC서울 활동년도 : 2005~2007

FC서울 통산 기록 : 71경기 8골 23도움



2005년 이장수 감독을 사령탑에 앉힌 FC서울은 대대적인 전력보강에 나선다. 당시 서울은 이기형, 박성배, 노나또등 수준급 선수들을 영입해 스쿼드를 살찌웠고,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른 박주영까지 데려오며 스쿼드에 강력함을 더했다. 서울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출신의 공격형 미드필더 히칼도를 영입했다.


당시 K리그 용병들은 대부분 브라질이나 동유럽 출신의 용병들이어서 서유럽 출신의 히칼도의 입단은 꽤 이색적이었다. 당시 이장수 감독은 포르투갈에서 히칼도의 경기를 직접 보고, FC서울 입단을 간청했고, 이장수 감독의 끈질긴 설득 끝에 히칼도는 FC서울행을 결정했다. 포르투갈 청소년대표 출신에, 명문 보아비스타를 거쳤고, 포르투갈 리그 도움왕등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했던 히칼도 였지만 입단 당시 그를 주목하는 시선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팬들이 히칼도의 진가를 알아차리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남과의 2005년 첫 경기에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선발 출장한 히칼도는 2-3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24분 날카로운 코너킥으로 노나또의 헤딩골을 도우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히칼도는 수원과의 컵대회 경기에서도 결승골을 넣으며 맹활약 한다. 당시 수원은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김남일, 송종국등 화려한 선수들로 스쿼드를 채우고 있었지만 히칼도는 페널티킥 결승골 한방으로 수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한국무대에 완벽히 적응한 히칼도는 그 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인다. 다음 경기인 인천전에선 프랑코와 박주영의 골을 모두 어시스트 했고, 대전전 에선 1골과 백지훈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다. 광주상무와의 경기에선 1골, 울산과의 경기에선 1도움을 기록하며 컵대회 에서만 3골 5도움을 기록한 히칼도는 단숨에 서울 미드필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날이 더워지면서 히칼도의 기량도 절정에 다다랐다.


특히 그의 활약이 가장 빛났을 때가 7월 6일 부산전과 7월 10일 포항전. 부산과의 경기에서 히칼도는 전반 28분 정확한 크로스로 박주영의 헤딩 골을 도왔고 후반 11분엔 미드필드 지역에서 날카로운 패스로 또 한번 박주영의 골을 도우며 2도움을 기록. 팀의 2-1 승리를 도왔다. 7월 10일 포항전 에선 전반 15분과 32분 각각 박주영과 김은중의 골을 도우며 전반에만 2도움을 기록했고 후반 44분엔 정확한 코너킥으로 박주영의 헤딩골을 도우며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박주영과 히칼도의 콤비가 절정의 기량을 뽐낸 이 두 경기에서 박주영은 5골, 히칼도는 5도움을 기록하며 서울 막강 화력의 중심이 되었다.



  히칼도의 코너킥 장면






그의 오른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스는 서울 공격의 출발점 노릇을 톡톡히 했고, 상대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그의 패스는 ‘손으로 던져주는 것 만큼 정확하다.’ 라는 평을 들을 정도 였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정확한 패스를 찔러주는 그의 모습은 많은 서울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다. 2005시즌 그의 기록은 4골 14도움. 도움왕은 일찌감치 그의 몫이었고, 환상의 호흡을 보인 박주영은 무려 18골을 기록했다.


2006 시즌 초반엔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시즌 중반부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즌 중반에 열린 컵대회에서 히칼도는 2골 4도움을 올리며 팀의 컵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총 3골 6도움으로 변함없이 서울의 중원사령관으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히칼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장수 감독이 물러나고 귀네슈 감독이 부임한 2007년. 히칼도는 예전 만큼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히칼도 뒤에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을 두어 히칼도를 공격에 전념시킨 이장수 감독과 달리 귀네슈 감독은 수비가담 능력이 떨어지는 히칼도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설상가상 귀네슈 감독과 불화까지 겪으며 2007년엔 13경기 출전에 1골 3도움이란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결국 히칼도는 2007 시즌 종료 후 CD트르펜스로 이적했고 CD 아베스를 거쳐 지금은 축구 선수 생활을 접었다. 히칼도가 서울을 떠난지도 5년이 다 되가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북에 FC서울에서의 선수 생활을 그리워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또 FC서울 팬들에겐 'My friend' 라는 친근한 표현을 써주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FC서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3. 기성용







풀네임 : Ki Sung Yueng

생년월일 : 1989년 1월 24일

국적 : 대한민국

FC서울 활동년도 : 2006~2009

FC서울 통산 기록 : 80경기 8골 12도움




2007시즌을 끝으로 히칼도는 떠났지만 FC서울엔 새로운 ‘패스의 달인’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기성용. 젊은 선수를 중시하는 귀네슈 감독의 신임을 받은 기성용은 2008년부터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기성용은 지난 2006년 FC서울에 입단했지만 그 해엔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해가 바뀐 2007년 그는 히칼도의 뒤를 받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드디어 프로무대에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기성용은 그 해 캐나다에서 열린 ‘FIFA U-20월드컵’에서 3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하며 가능성을 보인다. 당시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최후방 수비수로 활약한 기성용은 기본적인 수비력과 동시에 최후방에서 자신의 장기인 패싱력까지 뽐내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결국 2007년 22경기에 출전하며 프로무대 적응을 끝낸 기성용은 히칼도가 팀을 떠나자 좀 더 공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귀네슈 감독 역시 기성용의 날카로운 패싱력에 주목. 수비력이 좋은 김한윤을 중원의 파트너로 배치하면서 기성용의 수비부담을 한결 덜어주었다. 등번호도 40번에서 17번으로 바꾼 기성용은 2008년 한 해에만 4골 2도움을 올리며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또 그는 그 해 10월 29일에 열린 수원과의 원정경기에선 이운재의 키를 살짝 넘기는 골을 터트렸고, 그 해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선 정확한 코너킥으로 아디의 선제골을 돕는 등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2008년 10월 29일 수원전. 결승골을 넣은 뒤 보여준 아데바요르 세리머니는 화제가 되었다.





국가대표에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는데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주전 미드필더로 출전했고 9월엔 요르단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곧이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북한과의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에서는 후반 23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는 등 빛보다 빠른 성장세로 단숨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중앙 미드필더로 손꼽혔다.


유망주에서 FC서울의 에이스로 성장한 기성용으로 인해 2009년 FC서울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다. 귀네슈 감독의 공격축구는 날이 갈 수록 무르익었고, 기성용을 비롯해 이청용, 김치우, 데얀, 정조국등이 포진한 스쿼드는 화려함을 더했다. 게다가 2008년 준우승까지 거두었기에 서울을 향한 기대는 그 어느때 보다 높았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서울은 개막전에서 전남을 6-1로 녹다운 시킨다. 이 경기에서 기성용은 팀의 4번째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 후 기성용은 정확한 킥을 앞세워 팀의 프리킥과 코너킥을 전담했고, 그 해 5월 30일엔 골문 구석을 찌르는 절묘한 프리킥으로 팀의 첫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여름이 되자 그의 장기인 패싱력도 뜨거워졌다. 7월 12일 인천과의 컵대회에선 전반 37분 프리킥으로 데얀의 골을 어시스트 했고, 전반 42분엔 정확한 전진패스로 다시 한번 데얀의 골을 도우며 팀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다음 경기인 강원전에서도 전반 9분과 44분. 각각 데얀과 이청용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두 경기 연속 2도움으로 맹활약했다.


이 후 9월 12일 전북과의 경기에선 데얀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했고, 11월 21일 전남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선 날카로운 스루패스로 정조국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여전히 큰 경기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 기성용은 결국 그 해 4골 10도움을 올리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한다. 이런 기성용을 기다리고 있는건 유럽진출. 스코틀랜드 최강팀인 셀틱으로 이적하면서 유럽진출의 꿈을 이룬다.
 

초반 기성용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파워축구에 적응하지 못하며 주전경쟁에서 밀리는 듯 했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2도움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당시 기성용은 그리스전에서 정확한 프리킥으로 이정수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16강 진출의 분수령이었던 나이지리아전에선 일명 ‘헤발슛’으로 일컬어지는 이정수의 골을 또 한번 어시스트하며 대한민국의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
 

이 후 셀틱으로 돌아온 기성용은 주전 미드필더 스콧 브라운의 부상으로 다시 기회를 얻었고 이 기회를 잘 살려 셀틱의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잡았다. 세인트미렌과의 시즌 첫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기성용은 인버네스와의 컵대회 경기에서 시즌 1호 도움을 올렸고 그 해 10월 24일 레인저스와의 ‘올드펌 더비’에서도 도움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2010~2011 시즌에서 4골 4도움을 기록한 기성용은 다음 시즌인 2011~2012전에선 코너킥과 프리킥은 물론 팀의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게 되었고 지난 우디네세와의 유로파리그 경기에선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번 시즌 현재 6골 5도움을 기록중인 기성용은 셀틱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으며 대표팀 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UAE와의 브라질 월드컵 3차예선 경기에선 89번의 패스 중 81회를 성공시켜 무려 91%의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4. 제파로프








풀네임 : Server Resatovich Djeparov

생년월일 : 1982년 10월 3일

국적 : 우즈베키스탄

FC서울 활동년도 : 2010.07~2011.07

FC서울 통산 기록 : 33경기 1골 8도움



빙가다 감독 체제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2010년. FC서울에 또 하나의 거물급 선수가 입단하게 된다. 그 선수는 바로 제파로프. 2008년 우즈베키스탄 득점왕 및 최우수 선수, 또 그해의 AFC 올해의 선수, 우즈베키스탄 주전 미드필더로 A매치 62경기 출전해 12골을 성공시킨 기록(2010년 7월 기준)을 보유한 특급선수를 6개월 단기 임대로 영입해 공격진을 강화했다.
 

172cm, 68kg의 작은 체구는 다소 염려되기도 했지만 제파로프는 그 해 7월 28일 데뷔전인 수원과의 컵대회 4강전 경기에서 비록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정확한 왼발킥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선보이며 기대감을 높였다. 결국 제파로프는 자신의 두 번째 경기인 7월 31일 데얀의 선제골을 어시스트 하며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고 8월 25일 컵대회 결승전에선 데얀의 선제골 어시스트, 8월 28일 수원과의 원정 경기에선 날카로운 왼발 프리킥으로 데얀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짧은 시간에 FC서울의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 잡는다.


또 자신의 생일인 10월 3일엔 하대성의 패스를 받아 K리그 데뷔골을 쏘아올리기도 했고 제파로프는 특유의 덤블링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이러한 제파로프의 활약 속에 서울은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직행 할 수 있었다.


제파로프의 멋진 덤블링 세리머니 장면






제파로프의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계속 되었다. 제주와 맞붙은 챔피언결정전 1차전. 후반 45분까지 1-2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던 서울. 이때 제파로프의 정확한 패스가 빛났다. 추가 시간인 후반 47분 우측면에서 볼을 잡은 제파로프는 많은 선수들이 몰려있는 페널티 에이리어 대신 빈 공간에 서있던 김치우에게 정확하게 연결했고 김치우가 이를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김치우의 이러한 극적인 골은 제파로프의 재치 있는 패스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골이었다.


12월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제파로프는 후반 27분 정확한 코너킥으로 아디의 헤딩 역전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챔피언결정전 2도움으로 팀 우승의 주역이 됐다. 2010년 그의 기록은 1골 7도움. 제파로프의 맹활약으로 인해 K리그 역시 우즈베키스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음 해 열린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제파로프의 활약은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대표로 출전한 제파로프는 2골 2도움을 올리며 조국을 아시안컵 4위에 올리기도 했다. 제파로프의 맹활약에 그의 주가는 치솟았지만 제파로프는 FC서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3년 계약을 맺었다. 제파로프의 이러한 활약은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했으며 카파제(인천), 게인리히(수원)등 다른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의 K리그 입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2011 K리그에서 제파로프는 부상과 몰리나와의 포지션이 겹치는 모습을 보이며 예전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밥으로 이적을 결정한다. 알 샤밥 이적 후에도 제파로프의 활약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2011년 AFC 올해의 선수상을 통산 두 번째로 수상했고, 우즈베키스탄 대표로도 일본전과 키르키스스탄전에서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go16korea20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