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FC서울은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랄 영입을 성사시켰다. 그 깜작 놀랄 영입의 주인공은 차두리. 2002 한일 월드컵과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표 선수 였으며 프랑크푸르트, 프라이부르크 등 분데스리가 여러 팀과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 셀틱에서 활약한 바 있는 거물급 선수가 FC서울의 일원이 된 것이다. 뒤셀도르프와 계약을 해지하며 무적 상태에 놓여 있었던 차두리는 FC서울 입단에 성공하며 지난 2002년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이후로 11년 만에 국내 무대에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인 차두리이기에 많은 팬들이 차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FC서울 입단 기념으로 차두리의 일대기를 알아보기로 했다.




차두리의 고향은 독일이다. 잘 알다시피 차두리는 아버지인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한창 맹위를 떨칠 당시에 태어났다. 차두리가 태어난 해인 1980년은 차범근이 UEFA컵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해라 차두리는 복덩이었다. 최고의 축구선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차두리 역시 어릴때부터 축구를 즐기면서 자랐다. 1998년에 출간된 차범근의 자전 에세이 ‘네 꿈을 펼쳐라’에 따르면 ‘아들 두리는 4살 때부터 축구를 했고, 멋지게 자책골을 넣고는 자신이 골을 넣었다며 좋아했다’ 라고 나와 있다. 차두리는 독일에 머물 당시 아버지의 소속팀이었던 바이에르 레버쿠젠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축구에 입문했고, 차범근이 선수 은퇴 후 울산현대의 지휘봉을 잡자 차두리는 울산 현대중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 무렵 차두리의 부모님은 차두리를 계속 축구 선수로 키울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차두리 속에 있는 축구DNA는 어찌하지 못했고, 중3때 서울 배재중학교로 전학하면서도 선수생활을 지속했다. 배재고에 진학한 차두리는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5골을 넣으며 공동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고려대학교로 진학한 차두리는 올림픽대표팀 상비군에 뽑히기도 했고, 거기서 히딩크 감독에 눈에 들어 국가대표팀에 입성하게 된다. 히딩크 감독은 대통령배 대회와 추계대학연맹전에서 뛴 차두리를 눈여겨 봤고, 빠른 스피드와 단단한 체격, 스태미너까지 갖춘 차두리를 높이 평가했다.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가 대표팀에 뽑히니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건 당연지사. 그래서 당시 히딩크 감독은 미디어담당관에게 ‘차두리에게 몰려드는 인터뷰 횟수를 제한하라’ 라는 지시를 내리며 그를 관리했다. 차두리가 A매치 데뷔전을 치른 건 2001년 11월 8일. 당시 전주에서 열린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차두리는 후반 40분 교체 투입되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차두리는 골드컵에도 출전하며 대표팀의 젊은 피로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 덕에 대표팀에 많은 비판이 쏟아졌고, 그 중 하나가 ‘너무 젊은 선수들만 쓴다’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차두리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차두리는 스스로 시련을 극복했다. 2002년 4월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전반 26분 안정환의 패스를 받아 감각적인 발리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A매치 12경기 만에 기록한 첫 골. 차두리는 후반 38분 최태욱의 추가골을 어시스트 까지 하며 펄펄 날았고, 이후 젊은 선수들을 향한 비판의 시선은 사라졌다. 차두리는 잉글랜드, 프랑스 등 강호들과의 평가전에서도 잇달아 출전했고, 결국 2002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월드컵에 출전하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차두리가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체격과 체력. 차두리는 ‘공포의 삑삑이’라고 불렸던 셔틀런 훈련에서 무려 151회를 소화 했다. 120회를 소화하면 A매치 90분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하니 차두리의 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차두리는 훈련 도중 정해성 코치와 부딪쳤는데 정해성 코치의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체격을 자랑했다.


2002 월드컵 폴란드전에 나선 차두리의 플레이 모습








차두리는 월드컵 첫 경기인 폴란드전부터 출전했다. 후반 43분 설기현과 교체 투입 된 차두리는 투입되자마자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안정환의 왼발 슈팅이 두덱에 손을 맞고 나오자 쇄도하여 골을 노렸지만 아쉽게 득점으로 연결시키진 못했다. 차두리가 다시 출전기회를 잡은건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차두리는 후반 37분 홍명보와 교체 투입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 차두리는 후반 45분 환상적인 슈팅으로 이탈리아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동점골이 터진 직후 맞이한 코너킥에서 차두리는 유상철의 헤딩 패스를 감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연결한 것이다. 슛은 부폰의 선방에 막혔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멋진 슛이었다. 이후 연장전에서 활발하게 윙플레이어 역할을 수행한 차두리는 2-1 역전승에 기여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차두리는 독일과의 4강전에서 처음으로 선발 투입된다. 라이트윙에 배치된 차두리는 전반 7분 이천수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내줬고, 전반 15분엔 우측면을 돌파하다 박지성의 슈팅을 이끌어내는 등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아쉽게 0-1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터키와의 3-4 위전에서도 후반 교체투입된 차두리는 월드컵에서 4경기에 출전 150분을 소화했다. 월드컵 직전 차두리는 ‘내가 못하면 아버지께서 해설하기 힘드실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부담을 가졌다고 했지만, 팀내 유일한 대학생 선수로서 그는 월드컵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를 기다리는건 유럽진출. 차두리는 월드컵 직후 아버지가 뛰었던 바이에른 레버쿠젠과 입단 계약을 체결했으며, 바로 빌레펠트로 임대 이적하며 분데스리가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등번호 7번을 받으며 기대를 모은 차두리는 자르브뤼켄과의 독일컵 1라운드 경기에서 후반 16분 교체 투입 되었다. 열흘 후엔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며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고, 73분을 소화했다. 이후 헤르타 베를린전에서도 후반 26분 교체 투입되며 두 경기 연속으로 출전한 차두리는 슈투트가르트전에서도 후반 17분에 교체 투입되었지만 공격포인트를 올리지 못했다. 차두리는 전반기에만 9경기에 출전했지만 특별한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해 연말에 열린 레알마드리드vs세계올스타 경기에 세계올스타 대표로 뽑혀 후반 15분 카푸와 교체 투입되어 그라운드를 누볐다. 후반기를 앞두고 가진 연습 경기에서 차두리는 엄청난 활약으로 전망을 밝게 했다. 차두리는 터키 팀인 데니즐리스포르, 코갤리스포르전에서 모두 골을 넣었고, 독일 2부리그 팀인 오쉬나 부르크전에서도 추가골을 넣으며 팀의 2-0 승리를 이끈 것이다. 덕분에 베노 묄만 감독의 신임을 얻은 베르더 브레멘과의 후기리그 첫 경기에서 선발 출장했고, 데뷔골을 넣으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차두리는 전반 40분 브링크만의 중거리슛이 상대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지만 달려들어 침착하게 차넣으며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독일 최고의 팀인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도 선발 출장해 67분을 소화한 차두리는 볼프스부르크과의 경기에서도 선발 출장하는 등 서서히 주전으로 자리를 굳혀나갔다. 이후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는 분데스리가 진출 후 처음으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아쉽게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다. 차두리는 장딴지 부상으로 3경기 결장하기도 했지만 시즌 막판인 보훔전과 한자 로스토크전에서 연속으로 풀타임 출전하기도 했다. 그의 분데스리가 데뷔 시즌 기록은 23경기 출전 1골 1도움. 하지만 소속팀인 빌레펠트가 2부리그로 강등되며 향후 거취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결국 차두리는 아버지가 뛰었던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프리시즌 연습경기에서 5경기 출전 10골을 터트리며 엄청난 골감각을 자랑한 차두리는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됐고, 바이에른 뮌헨과의 개막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주전 공격수로서 전망을 밝게 했다. 차두리는 시즌 두 번째 경기인 레버쿠젠전에도 선발 출장했고, 전반 42분 니코 프롬머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시즌 첫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두 번째 도움은 독일컵에서 나왔다. 키커스 오펜바흐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차두리는 후반 10분 정확한 헤딩 패스로 또 다시 니코 프롬머의 골을 도우며 시즌 두 번째 도움을 기록했다. 이후 차두리는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전에서 선발 출장하여 59분을 소화하며 팀의 리그 첫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 차두리는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도 선발 출장해 감각적인 힐패스로 시즌 세 번째 도움을 기록했고, 팀의 전반기 19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강등권을 맴도는 팀 성적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후반기가 되도 분데스리가에서 차두리의 골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대신 대표팀에서 그의 골 소식이 들렸다. 차두리는 레바논과의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경기에서 전반 35분 이영표의 크로스를 헤딩 슈팅으로 연결하며 팀의 첫골을 성공시켰다. 흐름을 탄 차두리는 분데스리가에서도 고대하던 골을 터트렸다.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에서 전반 18분 헤딩골로 팀의 첫 골을 안기며 2-1 승리를 이끈 것이다. 이후 차두리는 소속팀에서 꾸준한 출장기회를 받았고, 대표팀에서도 중용받았지만, 소속팀과 대표팀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았다.





대표팀은 약체 몰디브와도 비기며 자존심을 구겼고, 프랑크푸르트는 16위를 기록하며 2부리그에 강등된 것이다. 차두리는 또 다시 거취가 불투명했지만 잔류를 선언했고, 2004 아시안컵 준비에 들어갔다. 차두리는 아시안컵을 앞두고 열린 트리니다드토바고와의 평가전에서 후반 7분 김태영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넣으며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본프레레에게 눈도장을 받았고, 차두리는 쿠웨이트와의 아시안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전반 45분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8강전에서 이란에게 3-4로 패하며 탈락했다.




소속팀으로 돌아온 차두리는 그로이터 퓌르트와의 DFB포칼컵 2라운드 경기에서 골을 터트리며 시즌 전망을 밝게 했다. 차두리의 2부리그 첫골이 터진 것은 아흐렌전. 차두리는 이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전반 2분 팀의 첫골이자 동점골을 터트렸다. 차두리의 활약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반 39분 반 렌트의 골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차두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읜 2-3으로 패했다. 이후 부르그하우젠과의 경기에서 시즌 2호골을 기록한 차두리는 부산에서 열리는 독일과의 평가전을 위해 대표팀에 합류했고, 차두리는 이 경기에서 조재진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사상 최초로 독일을 꺾는데 일조했다. 당시 독일은 미하엘 발락, 필립 람, 올리버 칸 등 주전들을 풀가동 했지만, 차두리의 맹활약 속에 3-1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두리의 모습





전반기를 12경기 출전 2골 1도움으로 마감한 차두리는 아흐렌과의 후반기 첫 경기에서도 풀타임을 소화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덕분에 차두리는 쓰나미 자선 경기에 호나우딩요 11 소속으로 경기에 나섰고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차두리는 자르브르켄 전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물오른 모습을 보였고, 오베른하우젠 전에선 시즌 3호골을 터트렸다. 차두리는 그로이터 퓌르트 전에서도 시즌 여섯 번째 도움을 기록하며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우즈베키스탄과의 독일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도 후반 이동국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차두리는 이 경기 Man of the match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아흐렌과의 경기에선 일곱 번째 도움. 운터하임과의 경기에선 결승골이자 시즌 4호골을 넣었다. 에지르비르게와의 경기에선 시즌 5호골을 터트리며 차두리는 주전 공격수로 우뚝 섰다. 아인트라흐트 트리어전에선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처음으로 멀티골을 작렬한 차두리는 시즌 7골로 득점랭킹 20위 내에 들었고, 팀 역시 3위를 기록하며 1부리그 승격에 청신호를 켰다. 이어 열린 에어푸르트전에서도 8호골을 작렬 시킨 차두리는 4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고, 베켄바워의 극찬을 받으며, 2주 연속으로 주간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다. 차두리의 이러한 활약에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은 차두리에게 메일을 보내며, 격려했다.




차두리는 부르크하우젠과의 시즌 최종전에서 전반 17분 베니 쾰러의 선제골을 도우며 3-0 승리를 이끌었고 팀은 19승4무11패 승점 61점으로 3위를 기록하며 승격을 확정했다. 차두리 역시 그 시즌에 29경기 출전 8골8도움으로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대표팀에 합류한 차두리는 우즈베키스탄, 쿠웨이트와의 원정 2연전에 출전하며 우리나라의 독일월드컵 본선진출 확정에 힘을 보탰다. 소속팀으로 복귀 후 가진 연습 경기에서 세 경기 연속으로 골을 터트린 차두리는 레버쿠젠과의 개막전에서 풀타임 출전했고,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에서도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고, 팀의 2연패를 지켜봐야했다.




고대하던 첫 골은 5라운드에서 나왔다.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 후반 45분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패배의 위기에서 구했다. 하지만 차두리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팀은 최하위로 처졌고, 차두리 역시 분데스리가 공격수 중 가장 낮은 평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차두리는 FC쾰른전에서 2호골을 성공시켰지만 교체 투입되는 일이 잦았다. 차두리의 포지션이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변경되었을때가 이 무렵. 차두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에서 공격수가 아닌 윙백으로 출전하며 풀타임을 소화했고,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줄곧 윙백으로만 출전한 차두리는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DFB포칼컵에선 공격수로 잠시 복귀하기도 했지만, 차두리는 윙백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전 빈도가 들쭉날쭉하며 독일월드컵 출전에 위기를 맞았다. 베어벡 코치가 관전한 경기에서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한 차두리는 설상가상 부상까지 당했고, 결국 독일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낙마하는 아픔을 맛봤다.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 차두리의 합류는 유력해 보였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은 끝내 차두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게다가 팀 역시 2부리그로 재강등되며 차두리는 거취를 놓고 또 다시 고민해야 했고, 결국 1부리그로 승격한 마인츠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마인츠는 차두리에게 등번호 2번을 부여하며 오른쪽 윙백으로 쓸 것임을 드러냈다. 차두리는 독일월드컵 엔트리 탈락의 아픔을 뒤로하고 전반기에서 8경기에 출전했고, 가나와의 A매치에서도 오른쪽 윙백으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차두리의 앞날엔 먹구름이 끼었다. 가나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차두리는 분데스리가에서도 팀이 전반기 최하위에 머무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 사이 경쟁자인 크리스티안 데미르타스가 부상에서 회복했고 설상가상 차두리는 발등 부상을 당하며 경쟁에서 조금씩 밀렸다. 덕분에 이적설, K리그 입성설 등 다양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차두리는 마인츠에서 한 시즌만을 소화한 채 2부리그 팀인 코블렌츠로 이적했다.




코블렌츠에서 차두리는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18라운드에선 주간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윙백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해에만 28경기에 출장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결혼을 하며 한 가정을 꾸린 차두리는 다음 시즌에서도 코블렌츠와 함께 했고, 34경기 출장에 2골 4도움을 기록. 나무랄 때 없는 시즌을 보냈다. 2부리그에서 활약한 탓에 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못한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맹활약을 펼친 선수를 가만히 둘 1부리그 구단은 없었다. 결국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하며 1부리그에 복귀했다. 차두리는 팀의 다섯 차례 프리시즌 경기에서 네 차례 출전하며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시즌 첫 경기인 DFB포칼컵 1라운드 엘버스베르크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2-0 승리를 도왔다. 독일 축구 전문지인 빌트와 키커는 차두리를 프라이부르크 주전 라이트백으로 예상하는 등 차두리는 주전확보에 청신호를 켰고, 결국 함부르크와의 분데스리가 개막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했다. 두 번째 경기인 슈투트가르트전에서도 풀타임을 소화하는 등 9경기 연속으로 풀타임을 소화했고 샬케04와의 경기에선 시즌 첫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주간 베스트 일레븐 선정, 2주연속 팀내 최고 평점 등 활약이 지속되자, 결국 대표팀에도 다시 부름을 받게 되었고, 차두리는 2009년 10월 세네갈과의 평가전을 통해 대표팀에 복귀했다.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선발 출장해 77분을 소화한 차두리는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렀고, 대표팀 라이트백 경쟁을 한층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 이후 차두리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며 1-2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프라이부르크의 신임은 변함없었다. 차두리는 13경기 연속으로 선발 출장했고, 대표팀 유럽원정에도 포함되어 덴마크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했다. 이후 2009년 마지막 A매치였던 세르비아전에서도 차두리는 후반 교체 출전하며, 소속팀과 대표팀 모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속팀 복귀 후 베르더 브레멘전에선 결장했지만 팀이 0-6으로 대패하면서 차두리는 다시 주전으로 복귀했다.




해가 바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차두리는 3월에 열린 코트디부아르와의 평가전에서도 풀타임을 활약하며 팀의 2-0 승리를 도왔다. 프라이부르크에선 부상 탓에 8경기 연속 결장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차두리는 남아공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되며 독일월드컵 대표팀 탈락의 아픔을 씻었다. 차두리는 사이티마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40분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본 수비수 세 명이 달려들었지만 차두리는 굴하지 않고, 탄탄한 체격을 바탕으로 저돌적인 돌파를 보여준 것이다. 당시 모습으로 팬들은 차두리에게 ‘로봇’,‘차미네이터’ 등의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한 차두리 (사진출처-KFA PHOTO)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차두리의 활약은 빛났다. 차두리는 대표팀이 펼친 4경기에서 아르헨티나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풀타임 출전했고,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선 과감한 중거리슈팅으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우루과이전 종료 후에도 차두리는 귀국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고,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인 셀틱과 입단 계약을 맺으며, 기성용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차두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경기인 SC브라가전에서 선발 출장해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팀은 아쉽게도 0-3으로 패했다.




이후 차두리는 에미레이츠컵에 출전했고, 리옹전 선발 출장해 55분 소화, 아스날전 후반 16분 교체 투입 등 셀틱에서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이후 차두리는 SC브라가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2차전 경기에서 풀타임 활약하며 팀의 2-1 승리를 안겼지만, 팀은 골득실에서 밀리며 탈락했다. 차두리의 리그 데뷔전을 보는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인버네스와의 개막전 경기에서 차두리는 오른쪽 수비수로 선발 출장해 단단한 수비와 날카로운 오버래핑으로 활약하며 팀의 1-0 승리를 도왔다. 기성용과 함께 ‘기 차 듀오’라고 불리며, 셀틱의 주전 선수로 활약한 차두리는 19라운드 경기에선 셀틱 데뷔골도 터트렸다. 세인트존스턴과의 경기에서 후반 45분 차두리가 우측면에서 감아찬 슈팅이 그대로 골문을 가른 것이다. 이에 질세라 기성용이 후반 추가 시간에 추가골까지 터트리며 셀틱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대표팀에 합류한 차두리는 아시안컵에 출전했고, 바레인전에선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구자철 골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경기에 출전하며 대표팀이 3위를 차지하는데 한몫한 차두리는 소속팀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잦은 대표팀 차출로 차두리는 지쳐있었고, 설상가상 부상까지 겹친 것이다. 팀은 겨울 이적시장에서 차두리와 같은 포지션인 미카엘 루스티를 영입하며, 차두리의 입지는 좁아졌다. 설상가상 감기 몸살로 2월에 열린터키와의 평가전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발목 부상까지 찾아오며 후반기에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차두리의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데뷔 시즌 기록은 16경기 출전 1골 1도움.하지만 차두리는 시즌 종료 후 열린 세르비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연속으로 출전하며 대표팀이 세르비아와 가나를 모두 이기는데 기여했다.


차두리의 셀틱 시절 모습 (사진출처-데일리메일)





차두리는 프리시즌 울버햄튼전, 인터밀란과의 더블린 슈퍼컵 경기에 출전했지만, 마크 윌슨에 밀려 시즌 초반엔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마크 윌슨이 11월에 무릎 수술을 받으며 기회가 왔고, 시즌 34라운드인 마더웰 전에선 헤딩슛으로 시즌 첫 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신예 아담 매튜스의 급성장으로 시즌 내내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했다. 차두리의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두 번째 시즌 기록은 23경기 출전 1골 1도움. 셀틱은 네 시즌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차두리는 프로 입성 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봤다. 셀틱과의 계약은 종료됐고, 차두리는 팀에 잔류하는 대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그의 새로운 행선지는 분데스리가의 뒤셀도르프. 뒤셀도르프에선 감독의 방침에 따라 예전 포지션인 공격수로 전환했지만 차두리는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뒤셀도르프에서 남긴 그의 기록은 컵대회 포함 11경기 출전. 그나마 풀타임 출전은 한 번 뿐이었다. 결국 시즌 도중 뒤셀도르프와 계약을 해지한 차두리는 무적 선수로 한달여를 보내다, FC서울과 계약을 맺고 K리그 클래식 무대에 입성했다.




차두리의 합류로 FC서울은 두 가지를 노릴 수 있다. 우선 오른쪽 측면 수비 강화다. FC서울 우측 윙백엔 고요한과 최효진이라는 훌륭한 선수가 있지만 두 선수 모두 체격이 작다는 단점이 있다. 단단한 체격이 장점인 차두리는 이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 줄 것이다. 또 차두리는 우유, 음료, 통신, 라면 등 다양한 CF에 출현했고, 최근에 나온 제약 광고에선 ‘간때문이야’ 라는 CM송을 히트 시키며,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래서 차두리의 합류는 마케팅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K리그 클래식이 개막한지 한달이 지났지만 FC서울은 네 경기에서 2무2패를 기록하며 좀처럼 디펜딩챔피언 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차두리의 합류는 FC서울 반전의 카드가 될 수 있을까? 많은 팬들은 차두리의 K리그 클래식 데뷔전을 기대하고 있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sskim12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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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azon de seul 2013.03.30 19:47








축구의 백미는 역시 골이다. 축구 경기에서 터지는 시원스런 골로 인해 양 팀의 희비가 엇갈리고,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열광한다. 이처럼 골은 실로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 골이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다. 골을 넣기 위해서는 패스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좋은 패스 없이는 좋은 골 역시 나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최고의 골잡이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패스의 달인’을 보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FC서울 역시 훌륭한 패스의 달인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마치 16년 동안 5만7천여회의 패스라도 한 듯 공격진 뒤에 배치되어 양질의 패스로 무수한 골들의 도우미 역할을 했다. 그럼 지금부터 FC서울 역대 최고의 ‘패스의 달인’들을 알아보자.



1. 안드레







풀네임 : Andre Luiz Alves Santos

생년월일 : 1972년 11월 16일

국적 : 브라질

FC서울 활동년도 : 2000~2002

FC서울 통산 기록 : 96경기 18골 27도움



FC서울의 전신인 LG치타스 시절에 활약했던 안드레는 2000년 팀의 세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로도 유명하다. 브라질 프로축구 2부리그 마릴리아클럽에서 뛰던 안드레는 키프로스 전지훈련에서 당시 감독이던 조광래의 눈에 띄어 한국땅을 밟는다. 브라질 외에 다른 나라에선 뛰어본 적이 없고 이적료 역시 50만 달러로 당시 유고에서 영입한 드라간의 이적료(120만 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에 그를 향한 주목도는 다소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팬들의 주목도를 조금씩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포항과의 대한화재컵 첫 경기에서 한국 무대 데뷔전을 치른 안드레는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대한화재컵 총 7경기에서 2골 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플레이메이커로서 제몫을 다하게 된다. K리그에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다. 빼어난 개인기와, 날카롭고 정확한 킥을 장착한 안드레는 조광래 감독 축구의 핵으로 자리잡았고. 시즌 중반 10연승의 상승세를 이끌기도 했다.
 

또 8월5일 전북전과 8월19일 부산전에선 두 경기 연속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이 2-1, 5-0의 승리를 거두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 이러한 안드레의 활약 속에 팀은 리그 1위를 달성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선착한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부천(現제주)을 상대하게된 안드레는 1차전에서 왕정현에게 정확한 패스를 배달하며 팀의 선제골을 이끌어냈고, 자신도 팀의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4-1 승리를 견인했다.


2차전에서는 부천 곽경근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끌려갔지만 후반 안드레의 정확한 프리킥이 동점골로 이어지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2000 K리그의 패권을 차지했다. 안드레의 활약상은 당시 공격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공격진에 포진했던 최용수와 정광민은 안드레의 뛰어난 패스를 공급받으며 각각 14골과 13골을 기록했고 안드레 역시 14도움으로 전경준(13도움)과 마니치(9도움)을 제치고 도움왕에 올랐고 K리그 베스트 미드필더에 뽑히기도 했다.
 

또 우수한 플레이메이커 답게 프리킥과 코너킥을 전담한 안드레는 9골 중 무려 8골을 프리킥으로 성공시키며 정확한 킥 솜씨를 자랑했다. 2001년엔 허리부상으로 2골 4도움에 그쳤지만 이듬해인 2002년엔 7골 9도움을 올리며 오름세를 보였고 2003년엔 중국 칭다오로 이적하게 된다. 그 뒤 베이징 현대를 거치며 3년 간 중국에서 뛴 안드레는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된다. 안드레가 K리그에서 활약한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간다. 하지만 절정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세 번째 우승에 큰 공을 세웠기에 올드팬들에겐 아직도 회자 되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2. 히칼도









풀네임 : Ricardo Nuno Queiros Do Nascimento

생년월일 : 1974년 4월 19일

국적 : 포르투갈

FC서울 활동년도 : 2005~2007

FC서울 통산 기록 : 71경기 8골 23도움



2005년 이장수 감독을 사령탑에 앉힌 FC서울은 대대적인 전력보강에 나선다. 당시 서울은 이기형, 박성배, 노나또등 수준급 선수들을 영입해 스쿼드를 살찌웠고,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른 박주영까지 데려오며 스쿼드에 강력함을 더했다. 서울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출신의 공격형 미드필더 히칼도를 영입했다.


당시 K리그 용병들은 대부분 브라질이나 동유럽 출신의 용병들이어서 서유럽 출신의 히칼도의 입단은 꽤 이색적이었다. 당시 이장수 감독은 포르투갈에서 히칼도의 경기를 직접 보고, FC서울 입단을 간청했고, 이장수 감독의 끈질긴 설득 끝에 히칼도는 FC서울행을 결정했다. 포르투갈 청소년대표 출신에, 명문 보아비스타를 거쳤고, 포르투갈 리그 도움왕등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했던 히칼도 였지만 입단 당시 그를 주목하는 시선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팬들이 히칼도의 진가를 알아차리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남과의 2005년 첫 경기에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선발 출장한 히칼도는 2-3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24분 날카로운 코너킥으로 노나또의 헤딩골을 도우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히칼도는 수원과의 컵대회 경기에서도 결승골을 넣으며 맹활약 한다. 당시 수원은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김남일, 송종국등 화려한 선수들로 스쿼드를 채우고 있었지만 히칼도는 페널티킥 결승골 한방으로 수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한국무대에 완벽히 적응한 히칼도는 그 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인다. 다음 경기인 인천전에선 프랑코와 박주영의 골을 모두 어시스트 했고, 대전전 에선 1골과 백지훈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다. 광주상무와의 경기에선 1골, 울산과의 경기에선 1도움을 기록하며 컵대회 에서만 3골 5도움을 기록한 히칼도는 단숨에 서울 미드필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날이 더워지면서 히칼도의 기량도 절정에 다다랐다.


특히 그의 활약이 가장 빛났을 때가 7월 6일 부산전과 7월 10일 포항전. 부산과의 경기에서 히칼도는 전반 28분 정확한 크로스로 박주영의 헤딩 골을 도왔고 후반 11분엔 미드필드 지역에서 날카로운 패스로 또 한번 박주영의 골을 도우며 2도움을 기록. 팀의 2-1 승리를 도왔다. 7월 10일 포항전 에선 전반 15분과 32분 각각 박주영과 김은중의 골을 도우며 전반에만 2도움을 기록했고 후반 44분엔 정확한 코너킥으로 박주영의 헤딩골을 도우며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박주영과 히칼도의 콤비가 절정의 기량을 뽐낸 이 두 경기에서 박주영은 5골, 히칼도는 5도움을 기록하며 서울 막강 화력의 중심이 되었다.



  히칼도의 코너킥 장면






그의 오른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스는 서울 공격의 출발점 노릇을 톡톡히 했고, 상대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그의 패스는 ‘손으로 던져주는 것 만큼 정확하다.’ 라는 평을 들을 정도 였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정확한 패스를 찔러주는 그의 모습은 많은 서울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다. 2005시즌 그의 기록은 4골 14도움. 도움왕은 일찌감치 그의 몫이었고, 환상의 호흡을 보인 박주영은 무려 18골을 기록했다.


2006 시즌 초반엔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시즌 중반부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즌 중반에 열린 컵대회에서 히칼도는 2골 4도움을 올리며 팀의 컵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총 3골 6도움으로 변함없이 서울의 중원사령관으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히칼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장수 감독이 물러나고 귀네슈 감독이 부임한 2007년. 히칼도는 예전 만큼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히칼도 뒤에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을 두어 히칼도를 공격에 전념시킨 이장수 감독과 달리 귀네슈 감독은 수비가담 능력이 떨어지는 히칼도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설상가상 귀네슈 감독과 불화까지 겪으며 2007년엔 13경기 출전에 1골 3도움이란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결국 히칼도는 2007 시즌 종료 후 CD트르펜스로 이적했고 CD 아베스를 거쳐 지금은 축구 선수 생활을 접었다. 히칼도가 서울을 떠난지도 5년이 다 되가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북에 FC서울에서의 선수 생활을 그리워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또 FC서울 팬들에겐 'My friend' 라는 친근한 표현을 써주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FC서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3. 기성용







풀네임 : Ki Sung Yueng

생년월일 : 1989년 1월 24일

국적 : 대한민국

FC서울 활동년도 : 2006~2009

FC서울 통산 기록 : 80경기 8골 12도움




2007시즌을 끝으로 히칼도는 떠났지만 FC서울엔 새로운 ‘패스의 달인’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기성용. 젊은 선수를 중시하는 귀네슈 감독의 신임을 받은 기성용은 2008년부터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기성용은 지난 2006년 FC서울에 입단했지만 그 해엔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해가 바뀐 2007년 그는 히칼도의 뒤를 받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드디어 프로무대에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기성용은 그 해 캐나다에서 열린 ‘FIFA U-20월드컵’에서 3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하며 가능성을 보인다. 당시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최후방 수비수로 활약한 기성용은 기본적인 수비력과 동시에 최후방에서 자신의 장기인 패싱력까지 뽐내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결국 2007년 22경기에 출전하며 프로무대 적응을 끝낸 기성용은 히칼도가 팀을 떠나자 좀 더 공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귀네슈 감독 역시 기성용의 날카로운 패싱력에 주목. 수비력이 좋은 김한윤을 중원의 파트너로 배치하면서 기성용의 수비부담을 한결 덜어주었다. 등번호도 40번에서 17번으로 바꾼 기성용은 2008년 한 해에만 4골 2도움을 올리며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또 그는 그 해 10월 29일에 열린 수원과의 원정경기에선 이운재의 키를 살짝 넘기는 골을 터트렸고, 그 해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선 정확한 코너킥으로 아디의 선제골을 돕는 등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2008년 10월 29일 수원전. 결승골을 넣은 뒤 보여준 아데바요르 세리머니는 화제가 되었다.





국가대표에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는데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주전 미드필더로 출전했고 9월엔 요르단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곧이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북한과의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에서는 후반 23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는 등 빛보다 빠른 성장세로 단숨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중앙 미드필더로 손꼽혔다.


유망주에서 FC서울의 에이스로 성장한 기성용으로 인해 2009년 FC서울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다. 귀네슈 감독의 공격축구는 날이 갈 수록 무르익었고, 기성용을 비롯해 이청용, 김치우, 데얀, 정조국등이 포진한 스쿼드는 화려함을 더했다. 게다가 2008년 준우승까지 거두었기에 서울을 향한 기대는 그 어느때 보다 높았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서울은 개막전에서 전남을 6-1로 녹다운 시킨다. 이 경기에서 기성용은 팀의 4번째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 후 기성용은 정확한 킥을 앞세워 팀의 프리킥과 코너킥을 전담했고, 그 해 5월 30일엔 골문 구석을 찌르는 절묘한 프리킥으로 팀의 첫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여름이 되자 그의 장기인 패싱력도 뜨거워졌다. 7월 12일 인천과의 컵대회에선 전반 37분 프리킥으로 데얀의 골을 어시스트 했고, 전반 42분엔 정확한 전진패스로 다시 한번 데얀의 골을 도우며 팀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다음 경기인 강원전에서도 전반 9분과 44분. 각각 데얀과 이청용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두 경기 연속 2도움으로 맹활약했다.


이 후 9월 12일 전북과의 경기에선 데얀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했고, 11월 21일 전남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선 날카로운 스루패스로 정조국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여전히 큰 경기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 기성용은 결국 그 해 4골 10도움을 올리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한다. 이런 기성용을 기다리고 있는건 유럽진출. 스코틀랜드 최강팀인 셀틱으로 이적하면서 유럽진출의 꿈을 이룬다.
 

초반 기성용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파워축구에 적응하지 못하며 주전경쟁에서 밀리는 듯 했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2도움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당시 기성용은 그리스전에서 정확한 프리킥으로 이정수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16강 진출의 분수령이었던 나이지리아전에선 일명 ‘헤발슛’으로 일컬어지는 이정수의 골을 또 한번 어시스트하며 대한민국의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
 

이 후 셀틱으로 돌아온 기성용은 주전 미드필더 스콧 브라운의 부상으로 다시 기회를 얻었고 이 기회를 잘 살려 셀틱의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잡았다. 세인트미렌과의 시즌 첫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기성용은 인버네스와의 컵대회 경기에서 시즌 1호 도움을 올렸고 그 해 10월 24일 레인저스와의 ‘올드펌 더비’에서도 도움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2010~2011 시즌에서 4골 4도움을 기록한 기성용은 다음 시즌인 2011~2012전에선 코너킥과 프리킥은 물론 팀의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게 되었고 지난 우디네세와의 유로파리그 경기에선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번 시즌 현재 6골 5도움을 기록중인 기성용은 셀틱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으며 대표팀 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UAE와의 브라질 월드컵 3차예선 경기에선 89번의 패스 중 81회를 성공시켜 무려 91%의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4. 제파로프








풀네임 : Server Resatovich Djeparov

생년월일 : 1982년 10월 3일

국적 : 우즈베키스탄

FC서울 활동년도 : 2010.07~2011.07

FC서울 통산 기록 : 33경기 1골 8도움



빙가다 감독 체제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2010년. FC서울에 또 하나의 거물급 선수가 입단하게 된다. 그 선수는 바로 제파로프. 2008년 우즈베키스탄 득점왕 및 최우수 선수, 또 그해의 AFC 올해의 선수, 우즈베키스탄 주전 미드필더로 A매치 62경기 출전해 12골을 성공시킨 기록(2010년 7월 기준)을 보유한 특급선수를 6개월 단기 임대로 영입해 공격진을 강화했다.
 

172cm, 68kg의 작은 체구는 다소 염려되기도 했지만 제파로프는 그 해 7월 28일 데뷔전인 수원과의 컵대회 4강전 경기에서 비록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정확한 왼발킥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선보이며 기대감을 높였다. 결국 제파로프는 자신의 두 번째 경기인 7월 31일 데얀의 선제골을 어시스트 하며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고 8월 25일 컵대회 결승전에선 데얀의 선제골 어시스트, 8월 28일 수원과의 원정 경기에선 날카로운 왼발 프리킥으로 데얀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짧은 시간에 FC서울의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 잡는다.


또 자신의 생일인 10월 3일엔 하대성의 패스를 받아 K리그 데뷔골을 쏘아올리기도 했고 제파로프는 특유의 덤블링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이러한 제파로프의 활약 속에 서울은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직행 할 수 있었다.


제파로프의 멋진 덤블링 세리머니 장면






제파로프의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계속 되었다. 제주와 맞붙은 챔피언결정전 1차전. 후반 45분까지 1-2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던 서울. 이때 제파로프의 정확한 패스가 빛났다. 추가 시간인 후반 47분 우측면에서 볼을 잡은 제파로프는 많은 선수들이 몰려있는 페널티 에이리어 대신 빈 공간에 서있던 김치우에게 정확하게 연결했고 김치우가 이를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김치우의 이러한 극적인 골은 제파로프의 재치 있는 패스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골이었다.


12월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제파로프는 후반 27분 정확한 코너킥으로 아디의 헤딩 역전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챔피언결정전 2도움으로 팀 우승의 주역이 됐다. 2010년 그의 기록은 1골 7도움. 제파로프의 맹활약으로 인해 K리그 역시 우즈베키스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음 해 열린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제파로프의 활약은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대표로 출전한 제파로프는 2골 2도움을 올리며 조국을 아시안컵 4위에 올리기도 했다. 제파로프의 맹활약에 그의 주가는 치솟았지만 제파로프는 FC서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3년 계약을 맺었다. 제파로프의 이러한 활약은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했으며 카파제(인천), 게인리히(수원)등 다른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의 K리그 입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2011 K리그에서 제파로프는 부상과 몰리나와의 포지션이 겹치는 모습을 보이며 예전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밥으로 이적을 결정한다. 알 샤밥 이적 후에도 제파로프의 활약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2011년 AFC 올해의 선수상을 통산 두 번째로 수상했고, 우즈베키스탄 대표로도 일본전과 키르키스스탄전에서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go16korea200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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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azon de seul 2012.02.02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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