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가 휴식기를 갖고 있는 요즘. 팬들은 다가올 시즌을 기다리며 이 추운 날을 보내고 있다. FC서울 팬들을 포함한 다른 팀들의 팬들도, 빨리 시즌이 개막해 축구장이 열기로 가득차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프시즌인 지금, FC서울의 인상적이었던 시즌을 알아보기로 했다. 분명 팬들에겐 2010, 2012 시즌처럼 우승을 거둔 시즌이 제일 인상 깊고 기억에 남아있겠지만, 그 외에도 FC서울이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즌은 있었다. FC서울의 인상적이었던 시즌. 그 첫 번째로 2005년 FC서울을 꼽아봤다.




변화로 시작한 2005년



 
2005년 FC서울의 시작은 변화였다. 우선 사령탑부터 변화를 줬다. 조광래가 떠난 자리에 중국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이장수를 선임한 것이다. 스쿼드에도 강력함을 줬다. 노나또, 이기형, 박성배, 히칼도 등을 데려왔고,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른 박주영마저 FC서울의 유니폼을 입히면서, 대대적인 전력보강을 했다. 유니폼도 기존의 빨간색에서 현재의 빨강과 검정이 섞인 유니폼으로 교체하는 등 FC서울은 많은 변화를 주면서 2005년을 준비했다.



화끈한 공격축구를 표방하는 이장수 감독은 시즌 개막전이자 컵대회 첫 경기인 전남과의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3-3 으로 비기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열린 대구와 성남과의 경기에서 잇달아 패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부산을 상대로 3-0 압승을 거두며 시즌 첫승을 거두긴 했지만 다음 경기인 부천전에서 0-1로 패하며 다소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서울은 히칼도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라이벌 수원을 1-0으로 이긴 뒤 인천에게 2-3으로 패했지만, 대전, 광주상무, 울산을 연달아 제압하며 시즌 첫 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전북에게 0-4로 패하고, 포항과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5위로 컵대회를 마감했다. 18득점을 올리며, 수원에 이어 리그 득점 순위 2위에 오른 화력은 인상적이었지만, 18실점으로 최다 실점을 기록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신예였던 박주영은 컵대회에서만 6골 1도움을 올리며, K리그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K리그 개막, 그리고 박주영 신드롬



 
2005 K리그는 전 후기 분할리그로 치러졌고, 5월 중순에 전기리그가 개막했다. 하지만 서울의 출발은 불안했다. 울산을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0-1로 패했고, 광주상무와의 경기에서도 3-5로 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날 경기에서 박주영이 프로 데뷔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여전한 골 감각을 보여줬다. 서울 역시 좋은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다음 경기인 전남전에서 3-1로 승리하며 리그 첫 승을 기록한 것이다. 좋은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 대전과의 4라운드 경기부터 전북과의 10라운드 경기까지 7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한 것이다. (3승4무)




박주영이 국가대표팀 차출로 5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 출전하지 못했지만, 노나또, 김은중 등이 잘 메우며 서울의 공격을 이끌었다. 성남과의 11라운드 경기는 1-4로 패했지만, 팀에 복귀한 박주영은 남은 전기리그 두 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인다. 부산과의 원정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2-1 승리를 이끈 박주영은 포항과의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4-1 압승에 일조한 것이다. 히칼도는 이 기간 동안 5도움을 기록하며, 특급 도우미로 활약했고, 박주영은 월드컵 예선 활약에 이어, K리그에서도 골 폭풍을 몰아치며, 대한민국을 ‘박주영 신드롬’에 빠뜨렸다.
 



박주영의 활약속에 K리그 경기장도 관중으로 가득했고, 포항과의 경기에선 48375명의 대관중이 입장하며, K리그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최다관중 기록은 2010년 FC서울이 새롭게 갱신했다) 전기리그를 마친 서울은 5승4무3패로 5위에 자리했다. 22골을 넣으며 팀 득점 1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실점 역시 19점으로 전북, 수원과 최다실점 3위에 오른 것은 아킬레스건이었다.  

 


 








후기리그 첫 경기에서 서울은 광주상무를 2-0으로 꺾으며, 쾌조의 출발을 보이는 듯 했지만, 다음 경기에서 울산과 1-1로 비긴 이후로 무려 7경기 연속 무승에 그치며,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라이벌 수원과의 원정 경기에서 박주영, 정조국, 한태유의 골로 3-0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서 열린 부산전에서도 2-0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하는가 했지만, 서울은 남은 두 경기인 대전전과 전남전에서 각각 0-0 무승부, 2-3 패배를 당하며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9위, 통합 6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FC서울의 2005년은 박주영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서울은 박주영 효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박주영은 데뷔 시즌에서 무려 18골을 터트리며 신인왕을 차지했고, 국가대표로도 월드컵예선에서 2골을 터트리며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박주영 덕분에 관중 동원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울은 당해에 45만8605명의 관중이 입장하며 역대 구단 별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고, 또 포항과의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에선 48375명의 관중이 들어차며,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도 세웠다. 덕분에 K리그 관중 역시 2,777,441명의 관중이 입장하며 K리그 역대 최다 관중을 동원했다. 그리고 데뷔 시즌을 치른 히칼도 역시 도움왕을 차지하며, 특급 미드필더로서 자존심을 세웠다. 

 



비록 성적은 아쉬움이 남는 시즌이다. 게다가 후기리그 초반 무승 행진을 기록한 것도 뼈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박주영, 히칼도를 주축으로 화끈한 공격축구를 선보이며, 최다득점 4위에 오른 것, 그리고 수원 원정에서 무려 3골을 폭발시키며 승리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들이 많았기에, FC서울의 2005년은 기억에 남을 만한 시즌이었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sskim1227@gmail.com    

신고
by corazon de seul 2013.01.14 00:58

2008년 신인왕 수상자 이승렬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일제 식민지 시절. 지식인이었던 육당 최남선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 라는 시를 통해 조국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음을 드러냈다. FC서울 역시 유망주 육성 정책을 통해 많은 젊은 선수들을 육성함으로써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드러냈고, 그 기대에 부합하듯 정조국,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등이 배출됨으로써 FC서울은 명실상부한 유망주들의 산실로 불리고 있다.


그 덕에 우수 젊은 선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신인왕 역시 대거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FC서울의 역대 신인왕 수상자는 누구였을까? 프로 선수 생활 동안 단 한번밖에 수상할 수 없는 신인왕의 영광을 차지했던 선수들을 지금부터 알아보자.




1. 최용수 (1994년 신인왕 수상)

최용수 감독의 젊었을때 모습 (사진출처 - 베스트일레븐)




FC서울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현재 감독을 맡고 있는 최용수는 구단 최초 신인왕의 주인공이다. 현역 시절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용수는 1994년 드래프트를 통해 LG치타스(現 FC서울)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 최용수는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지 못했다.


1994년엔 이임생(유공), 정재권(대우), 조진호(포항)등 쟁쟁한 선수들이 프로의 문을 두드린 해였고, 게다가 조진호는 그 해 열린 미국월드컵 대표팀에도 합류하는 등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용수는 드래프트에서 1순위가 아닌 2순위로 뽑혀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타 선수에 비해 떨어졌다.


여러모로 최용수가 신인왕을 수상하기엔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최용수는 그 해 4월2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고 다음 경기인 유공전에서 까지 골을 넣으며 두 경기 연속골로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윤상철이란 당대 최고의 공격수와 호흡을 맞추며 시즌 내내 주득점원으로 활약한 최용수는 결국 그 해 9골 4도움이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신인왕을 차지했고, 8월의 골든볼을 수상하는 등 훗날 한국 축구의 계보를 잇는 스트라이커의 탄생을 알렸다.


최용수의 신인왕 수상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신인왕은 대부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선수들이 차지했지만 최용수는 사상 두 번째로 드래프트 1순위가 아닌 선수로 신인왕에 등극했다. 또 그 해 최용수는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심적 고통을 이겨내고 얻어낸 신인왕이라 그 의미는 컸다. 신인 시절부터 맹활약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최용수는 이후 애틀랜타 올림픽,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도 맹활약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다.




2. 정조국 (2003년 신인왕 수상)







2003년 대신고를 졸업하고 LG치타스(現 FC서울)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로 뛰어든 정조국. 그는 프로 입단 이전부터 청소년대표팀 에서 맹활약하며 촉망받는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2002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이종민(상주), 임유환(전북)등과 호흡을 맞춘 정조국은 3골을 넣으며 공격수로서 제몫을 다했고 특히 일본과의 결승전에선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의 1-0 승리에 큰 기여를 한다. 이때의 활약으로 정조국은 히딩크 감독에 눈에 띄며 2002 월드컵 연습생으로 발탁되어 당시 대표팀과 함께 훈련하는 등 좋은 경험을 하게 된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프로에 뛰어든 정조국은 시즌 첫 경기부터 교체 출전하며 기대 받는 신인임을 증명했고 7번째 경기인 부천전에서 프로 데뷔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 후 광주전에선 멀티골, 라이벌 수원전에서도 한 골을 추가하는 등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정조국은 그 해 올스타에도 선발되며 중부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캐논슛 컨테스트에선 135km/h 의 킥을 보여주며 이동국(129km/h), 이기형(128km/h) 등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32경기 출전에 12골 2도움이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기록한 정조국은 그 해 11월 UAE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하며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런 정조국을 기다리고 있는 건 신인왕 수상. 덕분에 정조국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지만 2004, 2005년엔 슬럼프가 찾아왔고 김은중, 박주영등 최고의 공격수들이 서울에 입단하면서 설자리가 좁아졌다.
 

2003년 두자릿수 득점 이후 2009년까지 단 한차례도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정조국은 2010년 결혼과 함께 아들이 태어나면서 부활했고, 결국 13골을 넣으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큰 공을 세운뒤 프랑스 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현재 프랑스 1부리그 낭시에서 활약중인 정조국은 유럽에서 성공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3. 박주영 (2005년 신인왕 수상)






2004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가 열린 말레이시아. 대한민국의 시선은 당시 청소년대표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이 선수에게 쏠렸다. 그의 이름은 박주영. 당시 고려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박주영은 6경기에 출전해 6골 2도움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끔과 동시에 득점상과 MVP를 휩쓰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그 해 AFC 올해의 청소년상까지 휩쓴 박주영은 2005년 초 카타르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대회에서도 4경기 9골이라는 믿을 수 없는 득점력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러한 활약은 대한민국 축구팬들을 흥분하게 했고, 결국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2005년 FC서울에 입단했고 서울은 등번호 10번을 배정하며 기대를 보였다. 많은 팬들이 박주영의 골퍼레이드가 프로에서도 이어질까? 하는 관심속에 박주영은 두 번째 경기인 성남과의 원정경기에서 교체 투입 뒤 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 했다. 그 후 박주영의 행보엔 거침 없었다. 컵대회에서만 무려 5골을 추가한 박주영은 광주상무와의 리그 홈경기에선 해트트릭까지 달성하는 등 서울의 주축 공격수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그리고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인 포항전에선 2005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다. 당시 이동국, 김병지란 최고의 공격수와 골키퍼가 소속되었던 포항을 맞아 박주영은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팀의 4-1 대승을 이끈 것이다. 당시 감기몸살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출전한 박주영은 히칼도와 환상의 호흡을 보이며 48375명이라는 대관중 앞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러한 활약에 대한민국은 박주영 신드롬에 휩싸였다.
 

 2005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그의 기도세리머니를 보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주영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연일 관중으로 가득찼고 서울이 원정을 떠나면 해당 지역 관중들 역시 박주영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찾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K리그에서 연일 골 폭풍을 몰아치는 박주영이다 보니 그를 국가대표로 발탁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본프레레는 “훅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다.” 는 말로 그의 발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우즈베키스탄과의 독일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원정경기에서 교체 투입된 박주영은 정경호의 패스를 받아 자신의 A매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쏘아올리는 활약을 했고 뒤이어 열린 쿠웨이트전에선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 활약으로 본프레레 감독을 머쓱하게 했다.


시즌 후반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30경기 출전 18골 4도움이라는 성적으로 사상 첫 만장일치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6년엔 2년차 징크스로 많은 활약을 펼치진 못했지만 그 후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며 2008년 여름 프랑스의 AS모나코에 입단하며 유럽진출에 성공했다.



첫 시즌부터 모나코의 핵심 선수로 활약한 박주영은 5골5도움으로 팀 내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했고 이 후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남아공 월드컵에서 날카로운 프리킥으로 1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 잉글랜드의 명문 아스날 소속으로 아직 리그 데뷔전을 치르지 못하고 있지만, 곧 자신에게 찾아올 기회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이승렬 (2008년 신인왕 수상)







신갈고를 졸업하고 2008년 FC서울에 입단한 이승렬은 당시 감독을 맡고 있던 귀네슈에게 "K리그를 뒤흔들 재목"이라며 극찬을 받았다. 실제 그는 FC서울의 2008년 첫 경기인 LA갤럭시와의 친선 경기에도 출전하며 가능성을 인정 받았고 그 후 귀네슈의 총애 아래 꾸준히 출전 기회를 부여받으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자신감 넘치고 저돌적인 플레이는 신인 특유의 패기를 느끼게 해주었고 스트라이커와 측면 미드필더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 능력까지 보이며 전술적 활용도 역시 높았다. 2008년 최종 성적은 31경기 출전 5골 1도움. FC서울 역대 신인왕중 가장 낮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지만 그가 기록한 5골중 3골이 결승골일 정도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라이벌 수원과의 컵대회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거함 수원을 격침시키는데 단단히 한몫하는 등 큰 경기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서상민, 조동건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신인왕을 수상한 이승렬은 이듬해인 2009년엔 7골 1도움을 올리며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고 2010년엔 팀 내에서 유일하게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에 합류한 것과 동시에 10골 6도움을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2011년엔 19경기 출전, 1골에 그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팬은 없다. 기성용, 이청용의 뒤를 이어 유럽진출에 성공할 선수라는 평가를 받은 이승렬인 만큼 정상 컨디션을 찾는다면 2012년 이승렬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go16korea2002@yahoo.co.kr

신고
by corazon de seul 2011.12.27 22:07
| 1 |

티스토리 툴바